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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소선녀의 푸나무들의 노래

기사승인 2020.02.24  00: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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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블루베리

 

사진: 나 인 권

괜한 것의 무게로 속이 어수선할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갑니다. 한 걸음 한걸음 걸으며, 자신을 달래거나 타이르는 것이지요. 한겨울의 서늘한 기운이 뺨에 부딪혀 가슴으로 스밉니다.

 마당의 블루베리 나무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어라, 강추위 속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잎이 있네요. 새 붉은 줄기에서 나온 잎인데, 바람에 벌벌 떨면서도, 무슨 아쉬움이 남아 버티고 있는 것일까요. 

 진달래과 산앵두나무 속에 속하는 이 녀석이 우리 집에 온 것은 작년 봄이었어요. 트럭에 실려 왔는데, 두터운 천으로 된 커다란 분에 심겨져 있었지요. 마당에 내려놓은 문석씨는 멋쩍은 웃음만 남겨놓고 서둘러 가버리데요. 바쁘게 살면서도 마음 써준 손길은, 큰 선물이었어요. 꽃을 피운 자리마다 디리디리 열매가 열리고,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감탄의 연속이었지요. 잘 익은 베리를 따서 당신 입에 넣어주는 재미도 쏠쏠했고요. 새들도 그 달달한 맛을 알고 얼마나 들랑날랑하던지요. 

 잎을 떨군 가지는 벌써, 제법 실팍한 잎눈을 마디마디 달고 있습니다. 주어진 삶을 허투루 하지 않고, 애써 추스르고 있구나. 그만 잠잠해져서, 깊은숨을 들이쉬며 눈을 맞춥니다. 먹먹한 심정이에요. 한해살이를 마친 뒤, 잎이 바스러진 자리마다, 다시 새봄을 준비하는군요. 나무들의 성장은 비움으로 연속됩니다. 

 세상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베리나무가 이야기합니다. 시절을 따라 변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다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도 결국 부서지고 만다면, 지금, 주어졌을 때 붙잡아야겠지요. 어찌 보면 모든 것은 마지막으로 만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지요. 소중함의 가치가 두려움과 슬픔보다 앞서야 하는 게지요.

 걷다 보니 산길에 접어들었어요. 나무들이 산소를 내준 덕분에 기운이 북돋아지는 것이 대번에 느껴지네요. 침엽수를 제외한 나무들은 모두 맨몸이 되어, 성글어진 겨울 숲입니다. 떨어진 잎은 다른 생명을 돕기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됩니다. 나무는 자신의 영토를 만족할 뿐 서로의 영역을 넘보지 않고, 자기만 가져서 흔전만전 살지 않고, 다른 생명을 해치지도 않습니다. 자기와 다르다고 업신여기지도 않고, 뿌리내린 곳에서 한껏 자랄 뿐입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면서, 이런 본성을 상실해가는 것이 걱정입니다. 생태란 모든 숨탄것들의 더부살이인데, 인간은 헛것을 움켜쥔 채 고독합니다. 게다가 개념의 짝, 이분적인 사고 논리에 학습되어온 기성세대는, 신세대의 이중 속성이 내재 된 통합적인 사고에 적응하지 못하고, 덜컹거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자주 헝클어질 밖에요. 

 손이 시렵네요. 좀 더 두툼한 장갑을 가져올 걸 그랬어요. 말단마다 새 눈을 품고 있는 나무들이 부러워요. 그렇게 무성했던 우듬지 성장을 그치고 동면에 들어가 있지만, 봄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 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 새봄도 없는 것을, 이 겨울이 끝이구나 싶으니 마냥 쓸쓸합니다. 

 부엽토가 된 솔잎을 긁어모읍니다. 베리나무의 봄을 챙겨보려고요.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만 잎눈이 움트고, 이후에 열매가 잘 맺힌다지요. 두툼하게 덮어 줘야겠어요.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그새 속이 가라앉았네요.

 

김제시민의신문 webmaster@gjtimes.co.kr

<저작권자 © 김제시민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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