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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벽골제의 진실규명이 우선이다

기사승인 2017.10.15  21: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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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년전부터 우리시는 벽골제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있고, 이에 따른 각종 세미나와 발굴조사, 용역 등 인력 뿐 아니라 비용도 만만치 않게 소요됐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석굴암과 불국사(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덕궁(1997), 수원 화성(1997),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2000), 경주 역사유적지구(2000), 조선 왕릉 40기(2009), 하회·양동마을(2010), 남한산성(2014), 백제 역사유적지구(2015) 등 총 11개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의 등재과정은 각 국가별로 희망하는 유산의 잠정목록을 제출하고, 엄격한 서류심사를 거쳐 잠정목록으로 선정된 이후에 비로소 정식신청서를 문화재청이 유네스코에 다시 제출하게 된다. 그러면 유네스코는 전문가를 파견해 현지조사를 실시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게되며, 내부회의를 거쳐 유산을 평가하고, 21개국으로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등재를 결정한다. 이 과정이 빠르면 3년, 길게는 10년이 걸린다는게 전문가의 전언이다.

  만약 철저한 준비를 하지 못하거나, 기준에 미달해 한번에 등재결정을 받지 못하면 영원히 세계유산신청이 불가능한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설픈 등재신청은 자칫 미래의 기회를 박탈하는 우를 범하게 될 수 있음을 통감해야 한다.

  따라서 벽골제의 축조 목적이 당초 우리가 역사적으로 당연하게 알고 있었던 저수지의 '제방'의 역할이었는지, 아니면 바닷물의 침입을 막기위한 '방조제'였는지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진실 규명이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벽골제는 '부량면 포교리에서 월성리에 이르기까지 제방이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저수지로 우리 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며,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됐다"고 기록돼 있다.

  또 조선 성종 12년(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벽골제의 길이와 둘레, 면적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고, 몽리면적과 수문별로 물줄기의 흐름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저수지가 확실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벽골제의 원래 기능은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방조제였고, 수리시설은 저수지의 여수토나 암거수문이 아니라 바닷물의 진입을 막는 갑문 시설로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교수는 "흔히들 벽골제를 큰 저수지로 알고 있는데, 넓은 평야를 막아 어찌 저수지를 만들 수 있는가. 벽골제 북단의 포교리와 남단의 초승리는 자연 상태의 구릉이다. 이 두 구릉을 연결하는 방죽을 세워 동쪽의 넓은 평야를 바닷물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했다. 이것이 당시 세운 벽골제의 본래의 기능이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박상현외 4명이 공동저술한 <벽골제의 방조제 가능성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도 '벽골제는 서기 330년 시축 당시, 주변 토지는 갈대 등이 자라는 연안 습지였으며, 벽골제는 조수의 침입을 막고 습지의 제염을 통해 농지로 개발한 결과이므로 벽골제는 방조제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히고 있다.

  오랫동안 이 분야에 종사했던 송승영씨도 "냉정한 눈으로 벽골제 주변을 바라보자"고 충고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간척지를 만들기 위해 만든 광활방조제, 대창방조제, 서포방조제가 없다고 가정해보면, 일부 고지대의 논과 갯논만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현재의 부량 죽산 광활 넓은 평야는 거의가 일제시대 때 방조제를 막으면서 생긴 땅이기 때문에 축조 당시 벽골제 아랫쪽에 논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김제 벽골제와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를 삼한시대 3대저수지로 암기했었다.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에 따라 역사가 바뀔 수 있고, 상식이 비상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백제의 우리 조상들이 둑을 쌓아 물을 가두고 농사를 지은 것도 위대하지만, 대자연과 맞서 방조제를 쌓고 바닷물을 막아내며 일부 간척지도 만들었다면 더욱 위대하다.

  우리조상들이 피땀으로 쌓았던 벽골제의 진실규명이 가장 우선이고 시급하다. 진실에 입각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접근해야 하고, 제방인지, 방조제인지에 대해 분분한 의견도 자신있게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벽골제를 중심으로 안쪽과 바깥쪽 구간에 대한 지질 표본조사가 필요하다. 안쪽 몇군데의 지질연대를 측정해보면 과거에 물이었는지 논이었는지 알 수 있고, 바깥쪽을 조사해보면 과거에 갯벌이었는지, 논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과학 발달의 산물인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백제시대 지층을 보면 벽골제의 진실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학술적으로만 벽골제의 원래 기능을 논했지만, 이제는 과학으로 조사해 학술과 접목시켜보자. 진실을 외면한 무식한 복원은 오히려 문화재 훼손이 될 수 있다.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됐고, 공교롭게도 같은해 우리지명도 '벽골군'으로 개칭됐다. 그러나 이 '벽골군'이라는 이름은 427년후 백제를 침략해 멸망시킨 신라에 의해, 그것도 당의 방식에 따른 한자명으로 '김제군'으로 바뀌었다.

  시는 올해가 '김제군'이란 이름을 쓰게된 1260주년이라며 다음달 실내체육관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김제 정명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소요예산도 무려 8천만원이다.

  이 행사를 취소하고 그 예산으로 지질조사를 하자. 서기 330년, 벽골제를 축조한 백제인들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홍성근 기자 hong@gjtimes.co.kr

<저작권자 © 김제시민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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